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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됴프 난센
노르웨이의 탐험가·해양학자·정치가·인도주의자.

1888년, 1893년, 1895~9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북극 탐험대를 인솔했으며, 1900년, 1910~14년 북대서양에서 해양탐사를 지휘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구제사업을 펼쳐 1922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젊은시절

난센은 크리스티아니아에서 학교교육을 받은 뒤 1880년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그는 동물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이유는 현장실습을 통해 야외생활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과학연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으나 최초로 명성을 얻은 것은 탐험가로서였다.

젊은시절 난센은 옥외운동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 스케이트와 스키를 능숙하게 탔으며, 사냥과 낚시에도 뛰어났다. 이처럼 여러 가지 운동을 통해 건장한 체격을 갖추고 강인한 체력과 지구력을 기른 것이 뒷날 북극여행에서 큰 힘이 되었다. 1882년 난센은 그린란드 해역을 여행하기 위해 바다표범잡이선 ´바이킹호´에 합류했다. 그 항해에서 그린란드의 어마어마한 만년설의 원경(遠景)을 처음으로 보게 된 그는 틀림없이 그 만년설을 횡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금씩 계획을 진척시켜 1887년 공식적으로 탐험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사람이 사는 서해안 대신 동해안에서 출발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후퇴 가능성을 미리 차단해서 계속 전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1888년 5월, 6명의 탐험대가 노르웨이를 떠나 아이슬란드에서 동부 그린란드 해역으로 향하는 바다표범잡이선에 합류했다. 갖은 고초를 겪은 뒤 8월 15일 만년설 횡단에 착수한 그들은 폭풍과 혹한을 이겨내면서 9월 5일 그 여행중 고도가 가장 높았던 2,676m 지점에 도달했으며, 9월 26일 서해안의 아메랄리크피오르드에 도착했다. 그들은 고드호브라는 마을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는데, 이는 난센이 에스키모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저서 <에스키모의 생활 Eskimoliv>(1891)은 바로 이 고드호브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1889년 5월 일행은 의기양양하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1890년 난센은 훨씬 더 위험한 탐험계획을 노르웨이 지리학회에 제출했다. 그는 북극해의 얼음이 시베리아에서 스피츠베르겐 쪽으로 표류한다는 증거를 확인하고는, 배가 얼음에 걸릴 경우에도 위로 들리기만 할 뿐 부서지지 않는 특수한 배의 제작안을 내놓았다. 또한 그 배가 시베리아 동부 해안에서 얼어붙도록 만들어 그 해안으로부터 해류를 타고 북극해를 가로질러 스피츠베르겐으로 갈 것을 계획했다. 비록 그의 계획이 당대의 북극탐험가들로부터 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노르웨이 의회는 이 탐험을 위해 예상 경비의 2/3를 부담했고 나머지 경비는 오스카 2세 왕과 민간인들의 개인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전진´(Forward)한다는 의미에서 ´ 프람´(Fram)이라고 이름붙였던 난센의 배는 그의 설계로 건조되었으며, 지금은 오슬로 외곽에 보존되어 있다.

´프람호´는 탐험대 13명을 충원해 1893년 6월 24일 크리스티아니아 항을 출항했다. 9월 22일 배는 북위 78°50′, 동경 133°37′ 지점에서 얼음에 둘러싸인 채로 얼어붙어 긴 표류를 시작했다. 배는 완벽하게 얼음의 압력을 견뎌냈다. 1895년 3월 14일 난센은 프람 호가 계속 안전하게 표류하는 것에 만족해하면서 북위 84°4′, 동경 102°27′ 에서 하선(下船)한 뒤, F.H. 요한센 한 사람만을 동반한 채 개썰매와 카약을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4월 8일 그들은 그당시까지 인간이 도달한 범위에서는 가장 위도가 높은 북위 86°14′ 지점에 닿았다. 그곳에서 다시 방향을 돌려 프란츠조지프 섬으로 향했다. 그러나 북쪽 섬들에 가까이 감에 따라 물이 얼어 있지 않아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그곳에는 계절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1895년 8월 26일부터 이듬해 5월 19일까지 프레더릭잭슨아일랜드에서 겨울을 보냈다. 프레더릭잭슨아일랜드는 영국의 북극탐험가 이름을 따서 난센이 붙인 지명이다. 그들은 돌로 오두막을 짓고 바다코끼리 가죽으로 지붕을 덮었다. 겨우내 주로 북극곰과 바다코끼리 고기를 먹고 고래 등의 지방을 연료로 사용하면서 지냈다. 스피츠베르겐으로 향하고 있던 그들은 6월 17일 프레더릭 잭슨과 그 일행 잭슨-함스워드 탐험대를 만나 윈드워드(Windward)호를 타고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귀향일행은 8월 13일 바르되에 도착했다. 프람호도 북쪽에서 85°57′로 표류하면서 무사히 노르웨이에 도착했다. 그 프람호에 탑승했던 난센과 그의 동료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데, 그 환영은 9월 9일 그들이 크리스티아니아에 도착했을 때 절정을 이루었다. 난센이 쓴 2권의 탐험기록 <극북(極北) Fram over Polhavet>은 1897년 출간됐다.

과학적 업적

난센이 탐험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다면적인 품성과 태도에 기인한다. 그는 언제나 예측할 수 있는 어려움들을 면밀히 검토했으며 자신의 명쾌한 논리를 가져 결코 다른 사람의 의견에 흔들리지 않았다. 또한 예측되는 위험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알았으며,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세부사항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난센의 이러한 특징들은 그의 과학적 저술에도 나타난다. 1882년 베르겐 박물관의 동물학 관장직을 맡았다. 그는 동물학과 조직학의 주제에 관한 여러 논문을 쓰고 훌륭한 그림으로 도해를 달았다. 그 가운데 <중추신경계의 조직학적 요소의 구조와 결합 The Structure and Combination of Histological Elements of the Central Nervous System>(1887)으로는 크리스티아니아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그당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해석을 많이 싣고 있어 논문심사위원회는 심의과정에서 그 논문을 다소 미심쩍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다.

1896년 난센이 프람호 탐험에서 돌아오자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은 그에게 동물학 교수직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동물학에서 자연해양학으로 바뀌어, 1908년 해양학 교수가 되었다. 1896~1917년 그는 대부분의 시간과 정력을 바쳐 과학연구에 몰두했다. 자신의 탐험에서 얻은 과학적 결과들에 대해 보고서를 편집했으며 가장 중요한 부분들은 자신이 직접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국제해양탐사위원회´의 설립에도 참여해 얼마간 크리스티아니아에 있는 중앙연구소에서 지도를 맡았다. 1900년 노르웨이 해를 순항하는 ´마이클사즈호´에 합류했으며 1910년에는 ´프리티요프호´를 타고 북대서양 북동부를 순항, 답사했다. 다시 1912년에는 자신의 요트 ´베슬레모이호´를 타고 스피츠베르겐 해역을 방문했으며, 1914년 ´아르마우어 한센´을 타고 아조레스 제도에서 해양학 답사를 하면서 B.헬란드 한센과 합류하기도 했다. 1913년 난센은 바렌츠 해와 카라 해를 거쳐 예니세이 강 어귀를 여행하고 다시 시베리아를 거쳐 돌아왔다. 그는 이러한 항해 결과를 우수한 논문으로 펴냈으며 발간 작업의 일부에는 헬란드 한센도 협력했다. 난센은 해양학 연구에 불멸의 공헌을 세웠다. 여러 가지 도구들을 개선하고 새로 고안해냈으며 바람에 따른 해류의 움직임을 설명했다. 또한 북극의 바다에 대해 논하고 심해저(深海底)의 형성원리도 밝혀냈다.

난센은 또다른 주제들도 다루었다. 예를 들어 2권으로 집필한 <북쪽의 안개 속에서 Nord i Takeheimen>(1911)라는 저서에서는 16세기 초반부터 시도해온 북방 탐험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면서 비평하고 있다. 난센의 논문은 모두 흥미를 끈다. 그러나 너무 달필로 써서 장황한 감이 있으며 지나치게 세부사항에까지 주의를 기울여 오히려 간결하고 명료한 이해를 어렵게 한다. 반면에, 그의 유명한 여행보고서들은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보여주며, 특히 삽화까지 대부분 그가 직접 그려넣었다.

정치가·인도주의자

난센은 나이가 들면서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1905년 그는 노르웨이와 스웨덴 간의 연맹 해체에 관한 토론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의 자세는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한 민족의 자유를 구속하는 동맹은 어떤 것이라도 위험하며, 앞으로도 계속 위험 요소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노르웨이가 군주정을 설립하면서 난센은 초대 주(駐) 런던 대사로 임명되어 1906~08년 대사직을 수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중이었던 1917년에는 대미협상 노르웨이 위원회의 대표가 되었다. 그는 미국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노르웨이가 미국으로부터 필수적인 보급품들을 수입할 수 있도록 만족스런 합의를 끌어냈다.

1920년에는 국제연맹의 첫 회의에 노르웨이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했으며 죽을 때까지 이 회의의 종신회원으로서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큰 키에 골격이 굵은 체구, 눈처럼 흰 머리카락에 콧수염을 기르고 머리에는 챙 넓은 모자를 세련된 각도로 기울여 쓰고 다녀 제네바에서 이목을 끄는 인물이었다.

1920년 4월 국제연맹이사회는 난센에게, 그로서는 최초의 위대한 과업을 맡겼다. 그는 고등 판무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연합군 출신의 전쟁포로 약 50만 명을 러시아로부터 송환하는 책임을 맡았다. 소련정부는 국제연맹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만 난센과는 개인적으로 협상을 가졌다. 1922년 9월 난센은 국제연맹 제3차 회의에서 자신의 과업을 완수해 42만 7,886명의 포로를 송환했다고 보고했다.

1921년 8월 국제적십자위원회는 난센에게 기아에 허덕이는 러시아에 대한 구제사업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8월 15일 제네바 회의는 13개국 정부, 48개 적십자기구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그를 이 새로운 사업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8월 27일 소련정부와 협정을 맺어, ´국제 러시아 구제사업국´의 사무소를 모스크바에 설치하도록 승인받았다. 국제연맹은 난센의 자금원조 요청을 거부했지만, 그는 민간단체에 호소하고 대규모 집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필요한 기금조성에 성공했다.

1922년 7월 5일 제네바에서는 난민을 위한 신분증명서를 도입하는 국제협정이 난센의 발의로 체결되었다. 이 신분증은 ´ 난센 여권´이라 불렸다. 난센이 죽고난 뒤인 1931년 ´난센 국제난민 사무소´가 제네바에 창설되었다. 이곳은 주로 백계(白系) 러시아인과, 터키 출신 아르메니아인들을 수용했으며 뒤에는 독일출신 유태인들을 보살폈다. 1922년 난센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그 상금을 국제구제사업 증진에 사용했다.

孫明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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