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민속놀이
초파일의 민속은 단연 등과 관련된 것이 많다. 신라 이래로 시작된 등에
관한 문화가 초파일과 결합하여 민간 풍속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등을 만들고, 걸고, 켜고, 구경하는 모든 것들이 민간 속에 녹아들어 초파일은
등을 켜 온 가족의 평안을 기원하는 중요한 명절이 된 것이다.
바쁜 농사철에 한번 일손을 멈추고 한해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초파일은 우리
조상들의 소중한 민속 명절인 것이다.
1) 호기(呼旗)놀이
등간놀이라고도 한다. 예전부터 석가탄신일인 음력 4월 8일이 가까워오면
민가에서 집집마다 등을 다는 연등(燃燈) 풍습이 있었다.
연등일이 가까워지면 부잣집에서는 뜰에 등간(燈竿:등불을 달 장대 기둥)이라는
장대를 세우고 그 끝에 꿩 깃을 끼워 장식하고 물들인 비단을 잘라 깃발을
만들어 매다는데 이것을 호기(呼旗)라고 한다.
이 기에 줄을 매고 그 줄에 가족의 수대로 등을 달아맨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서는 나뭇가지나 추녀 끝에 빨랫줄처럼 줄을 매고 그 줄에 등을 단다.
석가탄신일이 되면 그 등에 불을 밝히는데, 등을 크고 높게 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호기놀이는 아이들이 등을 만들기 위한 재료비를 구하기 위하여 수주일
전부터 종이를 잘라서 등간에 매달아 들고 집집마다 누비고 다니면서 쌀이나
베를 얻는 풍속이었다.
아이들은 물고기 껍질을 벗겨 북을 만들어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면서 떼를
지어 다녔다. 등의 모양은 연꽃이나 목단 등의 꽃 모양이나, 수박이나
참외 등의 과일 모양, 거북이나 학, 물고기 등의 동물 모양 등 형형색색이었다.
등에는 태평만세(太平萬歲), 수복(壽福) 등의 글을 썼는데, 등에다
직접 쓰기도 하고 다른 종이에 써서 붙이기도 하였다.
이 당시는 석가탄신일이 어린이들에게는 오늘날의 명절처럼 즐겁게 놀 수
있는 날이었다. 종로 거리에는 장난감 시장이 열려 아이들을 꿈에 부풀게
하였는데, 일가 친척집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돈을 얻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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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등
초파일 연등놀이의 가장 중요한 소재인 등은 각종 기록이나 민요 등을
통해 볼 때 그 종류가 40여종이나 되 초파일이 얼마나 성했었는지 알
수 있다.
운종가 즉 종로의 등 파는 집에서 파는 등은 천태만상으로 오색이 찬란하고
값이 비싸며 기이함을 자랑했다.
종로에는 이 등을 보려고 사람들이 담벼락같이 몰려들고 등을 사서는 장난하며
놀기도 하고 등대에 달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등은 집에서 만들었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석류등, 수박등, 마늘등 등을 달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거북등, 학등 등을 달았다.
그밖에도 잉어나 호랑이, 표범 등 각종 동물이나 과일, 꽃, 어류 등의
모양을 본딴 등을 달았다. 등의 재료는 종이나 붉고 푸른 비단 등을
썼다.
등의 종류는 지금과는 달리 퍽 다양했다. 수박등, 마늘등, 연꽃등,
칠성등, 오행등, 일월등, 공등, 배등, 종등, 북등, 누각등, 난간등,
화분등, 가마등, 머루등, 병등, 항아리등, 방울등, 알등, 봉등,
학등, 잉어등, 거북등, 자라등, 수복등, 태형등, 만세등, 남산등
등이 있다.
또 영등이라는 것이 있는데 등 안쪽에 호랑이, 이리, 사슴, 노루 등의
모양으로 자른 종이를 끼워 넣어 등 안에서 회전하게 함으로써 등에서
비추이는 그림자를 감상하기도 했다. 이 등을 회전등, 주마등이라고 한다.
3) 등대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가와
관청, 저자에서는 모두가 등간(燈竿)을 세운다.
이 등간은 대나무를 연하여 묶고 그 높이는 십여 장(丈)이나 된다.
등간 위에는 비단이나 면포를 잘라서 꽂으며 깃발 밑에는 갈고리가 달린
막대기를 가로 대고 또 갈고리에는 줄을 얹어서 줄의 좌우끝은 땅 위에까지
내려오게 한다.
그런 연후 밤이 되면 등에다 불을 켜는데 많이 달 때는 십여 개의 등을
달고 적게 달 때는 3, 4개의 등을 매달아 놓는다. 일반 민가에서는
아이들 식구 수대로 매다는 것이 상례이다.' 라고 쓰여 있다.
초파일이 되면 관청이나 상가, 민가 모두 등대를 세웠다.
등대는 주로 대나무로 만들며 높이가 높으면 체면이 안 선다고 생각하여
경쟁적으로 높게 만들었다. 등의 꼭대기는 꿩의 꼬리털로 장식하거나 소나무
가지를 붙들어 매고, 채색 비단의 깃발을 만들어 붙였다. 그리고 그
깃발 바로 아래 부분에 가로 막대를 댄 다음, 가로 막대에 등을 걸
수 있도록 갈고리를 만들었다.
밤이 되면 등대에 등을 걸어 불을 밝혔는데 집안의 자녀수대로 등을 매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대나무 여러 개를 가로 엮은 등대에 수십 개의 등을 걸어
배의 돛대 모양으로 만들기도 했다.
한편으로 일월권을 꽂아 바람에 따라 돌게 한다든지 혹은 길게 자른 종이를
수십 발이나 되게 이어 붙여 용이 날아가는 모양처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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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잠두봉 관등놀이
잠두봉은 서울 남산의 북서쪽 봉우리를 말한다. 현재 서울 타워가 있고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는 곳으로, 누에가
뽕을 먹기 위해 머리를 들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잠두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사대문 안이 한눈에 들어와 경치가 아주 좋다.
초파일 밤이 되면 서울 장안은 가가호호 거리마다 등대를 높이 세우고
등을 달아 사람의 바다를 이루고 불의 성이 연출되었다. 마치 맑은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듯 가을하늘 은하수처럼 사대문 안이 휘황찬란했다.
그 날이면 악기를 가지고 거리를 돌며 노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초저녁이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잠두봉에 몰려들어 불야성을 이룬 서울의 장관을
구경했다고 한다.
이런 장관 때문에 시골에 사는 노인들은 잠두봉의 관등이 평생소원이기도
해서 효심이 깊은 사람들은 늙은 부모님들을 모시고 와 남산을 오르기도
했고, 왕이 직접 관등에 참가하거나 미행으로 '관등'했다는 고사도 전해진다.
조선 성종 때는 <한성십영>이라 하여 한성을 대표하는 열
가지 경치로 종로의 연등 구경을 꼽았고, 강희맹은 종가관등에서 '하늘
위에 항성이 일천 집에 떨어진 듯 한밤중 가는 곳마다 붉은 노을 감도누나…'라고
읊었으며, 정이오는 남산팔영에서 '사월파일 연등놀이 성대한데 승평 세월
얼마인가. 일반 초롱불 대낮같이 밝으니… 밤새워 구경해도 부족하여 닭
우는 새벽인 줄 몰랐네.' 라고 읊기도 했다.
5) 음식
초파일에만 먹는 독특한 음식이 있었다. 정월 대보름 행사의 일부가 초파일로
옮겨질 정도로 가장 큰 세시풍속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초파일이었지만
일반 명절과는 달리 육류나 어류를 쓰지 않고 소박한 음식을 마련하여
손님을 맞았다.
초파일에 마련하는 음식 중에는 유엽병이나 콩 요리, 미나리 등이 있었다.
일명 느티떡이라고도 하는 유엽병은 연한 느티나무 잎을 따다가 쌀가루와
섞어 찐 설기떡이다.
콩요리는 검은 콩을 깨끗이 씻어서 볶은 것이다. 송나라 때 장원이란
사람이 『오지』에서 '서울의 풍속에 부처의 이름을 욀 때(염불 또는
주력) 문득 콩으로 그 수를 세었다.
그러다가 사월 초파일 석가모니 탄신일에 이르러 그 콩에 소금을 약간
치고 볶아서 길에서 사람들에게 대접함으로써 (부처님과)인연을 맺게 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리가 얼마 전까지 간식으로 먹던 볶은 콩은 초파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 초파일에는 미나리를 삶아 파를 섞어 무친 음식도 즐겼으며, 철쭉꽃
그늘 밑에 앉아서 꽃잎 한두 잎을 따서 준비해온 쌀가루와 섞어 전을
부친 꽃떡을 즐기며 담소하는 풍속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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