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선생(1869.10.06~194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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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말에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 세우려 노력하시다가 여러 번 감옥에
갇히셨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시고 학교를 세워서 교포들의 민족정신을
북돋아 뒷날 독립운동에 필요한 많은 인재를 길러 내셨다. 선생님은
앞장서기보다는 뒤에서 궂은 일을 맡아하시는 든든한 어른이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의장·국무총리·주석 등을 역임하며
독립을 위해 애쓰시다가, 꿈에도 못 잊던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중국에서 72세로 돌아가셨다. |
조성환
선생(1875.07.09~1948.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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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말에 무관학교 학생으로 부패한 군부를 바로 잡으려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3년만에 석방되셨다. 1907년 김구·안창호·이동녕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투신하셨다. 1912년 일본
총리 가츠라 다로우를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유배형을 마친 뒤,
상하히로 망명하시어 항일운동을 하시다가, 다시 만주로 가서 청산리
전투에서 큰공을 세우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사부장, 외무부장
등을 역임하셨다. 조국에 돌아오시어 나라를 바로 잡는 일에 온
힘을 다 하시다가, 1948년 74세로 돌아가셨다. |
차리석
선생(1881.07.27 ~ 194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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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시는 한편 신민회에 가담하여 구국운동을
하셨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셨다. 3ㆍ1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신문'기자로 활동하시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시어 많은 활약을 하셨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임시정부가 돌아오게 됨에 그 준비에 여념이 없으시다
조국 땅을 밟지 못하시고, 중국에서 65세로 돌아가셨다. |
이봉창
의사(1910.08.10~193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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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사는 지금에 효창동에서 태어나서 자라셨다. 18세에 용산역
운전견습생으로 일하시며, '왜 우리 땅에서 일본인은 우대를 받고,
그 땅의 주인인 조선인은 천대를 받아야 하나' 하는 울분에 방황하시다가,
그것은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때문인 걸 깨닫고 독립운동에 한
목숨 바칠 것을 결심하고〈한인애국단〉에 가입하셨다. 1932년
김구 선생님의 지도로 일본 왕에게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하셨다.
그러나 폭탄이 약하여 불행히도 일왕을 명중시키지는 못했으나,
일본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이봉창
의사는 그 해에 일본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32세에 순국하셨다. |
윤봉길의사(1908.06.21~193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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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때 마을에 야학을 설치하고, 22세 때에는 농촌 발전을 위한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을 위한 농촌운동에
온 힘을 기울이셨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도 나라가 독립이
되기 전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중국으로
망명하셨다. 1932년 김구 선생님을 찾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
받칠 것임을 밝히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셨다. 그 해 4월
29일 김구 선생님의 지도로, 홍커우공원에서 거행하는 일본 왕의
생일과 일본의 중국 침략 승리를 기념하는 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 이하 요인을 폭살 시키고 붙들려 일본 감옥에서
총살형으로 25세에 순국하셨다. |
백정기
의사(1896.01.19~193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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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렵게 한문공부를 하셨다.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에서 항일운동을 선도했고, 그 후 동지들과
서울과 인천에서 일본의 군사시설 파괴와 요인암살을 꾀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만주로 망명하셨다. 다시 독립군 군자금을 구하려고
서울에 잠입하여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나 변성명을 하여
위기를 모면하셨다. 그 후 중국으로 망명하시어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력하셨다. 계속하여 상하이에서 중국의 친일분자들과
주중 일본대사를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일본 감옥에서 39세로 순국하셨다. |
안중근
의사(1879.07.16~191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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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무술 익히기를 즐겨하셨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 재산을 모아 진남포에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쓰셨다. 그러나 나라가 극도로 기울어지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셨다. 1908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1909년 10월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와 뒤따르던 일본인들을 하얼빈에서 사살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며 체포되셨다.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셨다. 안중근 의사의 나이 32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