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유적지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맞이하여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들의
얼을 추모하고 나라사랑 하는 마음을 굳건히 하시길 바랍니다.
순국선열추념비(殉國先烈追念碑)
|
건립일자
|
1965년 11월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292번지(읍사무소앞)
|
시설규모
|
부지 3평, 비1기(높이 2m)
|
약도
|
|
3*1운동
당시 남양주 화도읍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순국한 이달용*이승포
등의 열사를 추도하기 위하여 건립한 추념비이다. |
순국선열추념탑(殉國先烈追念塔)
|
건립일자
|
1992년 08월 15일 |
소재지
|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101(독립공원
내) |
시설규모
|
부지 1.800㎡ (545평),
높이 22.3m, 길이 40m, 폭 10.2m |
약도
|
|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장렬히 순국한 선열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탑이다. 순국선열유족회는 1987년 11월 15일
서대문형무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옮김에 따라 애국지사들과 항일투사들이
가장 많이 옥고를 치른 조국 수난의 현장이며, 우리 민족의 의기가
서린 성역인 이곳을 순국선열의 얼을 되새기는 민족정기 발양의
역사적 도장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전 국민의 뜻을 모아 성역화하고
원혼이 되신 순국선열을 추념하기 위하여 이 탑을 건립하였다.
이 추념탑의 폭 40m에 달하는 탑신의 우측에는 의병들의 항일전쟁,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활약상, 순국선열의 투옥 처형상, 유관순
열사의 3?1만세 운동상, 탑신 좌측에는 탑골공원의 3?1만세운동상,
안중근 의사의 활약상, 순국선열의 체포 투옥?처형 상징상, 독립군
청산리 전투상 등의 석조군상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석조군상
부조 아래의 오석벽면에는 순국선열의 이름이 새겨있고 벽돌을 쌓아
만든 탑신의 태극기는 순국선열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는 태극기가
쌓인 모습을 나타내고 그 의지와 투쟁의 하나하나가 모여 독립이라는
광명의 탑신이 이루어졌음을 상징하였다. |
순국열사비(殉國烈士碑)
|
건립일자
|
1949년 04월29일
|
소 재 지
|
전라북도 익산시 주현동 115 |
시설규모
|
높이 3m |
약 도
|
 |
1919년
4월 4일 이리장날을 기하여 문용기(文鏞祺)열사가 태극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중 왜적 총검에 태극기를 든 손을 절단당하고도
계속 만세를 부르다 순국한 현장에 이리 시민의 뜻을 모아 건립한
비이다. 비문은 이승만박사가 썼다. |
순국의사장진홍기념비(殉國義士張鎭弘紀念碑)
|
건립일자
|
1953년 07월 31일 |
소 재 지
|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석전
4리 |
시설규모
|
높이 2m |
약 도
|
 |
장진홍(1895~1930)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6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1918년 동단의 동지인 이내성(李乃成)의
소개로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 가서 동포 자제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귀국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사정을
파악하여 그것을 세계 각국에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1927년 4월 이내성의 소개로 掘切茂三郞으로부터 폭탄을 인도받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은행건물을 파괴하였고,
1928년 2월 일본 대판(大阪)의 동생집에 도피하여 있다가,
1929년 2월 13일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0년 6월 5일 옥중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